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모한 싱 (문단 편집) == 상세 == 1932년 9월 26일 [[펀자브]] 주 가흐[* 현재는 [[파키스탄]]의 영토이다.]에서 아버지 구르묵 싱과 어머니 아므릿 카우르[* 참고로 시크교에서 남성은 싱, 여성은 카우르를 성으로 사용한다.] 사이에서 태어나 [[시크교]] 가정에서 자라났다. 어릴 적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거의 조부모의 손에 자라다시피 했다고 한다. 1947년에는 [[인도 분단]]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갈라졌는데, 이때 고향인 가흐가 [[무슬림]]들이 대다수인 파키스탄에 포함되자 어쩔 수 없이 인도 [[암리차르]]로 이주했다. 만모한 싱은 펀자브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1952년에는 석사 학위를, 1954년에는 박사 학위를 연달아 따냈다. 1957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또 경제학 학위를 따냈고, 이후 인도로 돌아와 펀자브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1960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경제학 쪽으로는 끝판왕 수준의 커리어를 쌓았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둘다 경제학 학위를 받은 셈.[* 참고로 이때 그가 옥스퍼드에서 배운 [[케인스]]의 수정자본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마친 만모한 싱은 인도로 돌아와 펀자브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약 4년 동안 [[UN]]의 무역개발회의에서 일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는 수도 델리 대학교에서 국제무역학 교수로 지냈고, 워낙에 경력이나 스펙이 압도적이었던 덕에 철도부장관 라릿 나라얀 미쉬라가 1971년에 그를 대외무역부 경제자문위원으로 삼으면서 정계 쪽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1972년에는 인도 재무부의 수석자문위원이자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고 1976년에는 아예 재무부 차관까지 올랐다. 1980년부터 1982년까지는 국가계획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82년에는 인도 중앙은행 총재에 임명되면서 인도 전국의 경제를 총괄하는 자리에 오른다. 이후 1987년부터 1990년까지는 사우스 커미션[*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독립 경제정책 싱크탱크.]의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1990년에는 [[찬드라 셰카르]] 총리의 경제보좌관으로 뽑혔다. 경제와 관련된 요직이란 요직은 싸그리 거쳤으니 이정도 되는 인재를 정계에서 놔둘리가 만무했다. 1991년에 당시 [[나라심하 라오]] 총리가 직접 그를 불러 재무부 장관직을 맡을 것을 요청했고, 만모한 싱이 이를 거절하자 심지어 화를 내면서까지 만모한 싱을 끝끝내 장관직에 앉혔다. 그가 당시 재무부장관 직에 부임했을 당시 인도 경제는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인도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의 8.5%에 가까웠고 경상수지 적자는 전체 GDP의 3.5%에 달하면서 경제 지표들이 수직하락하고 있던 것. 어쩔 수 없이 인도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벌려야 했지만 국제통화기금은 구제기금을 지원하는 대신 인도 정부가 그때까지 시행하던 정부 통제 정책을 완화해야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도는 [[통제경제]]를 실행하면서 경제적으로 꽤나 옥죄는 경향이 강했다. 가장 대표적인 악법이 [[인도 제국]] 시절부터 내려와 1947년부터 시행된 기업 허가제였는데, 이 허가제라는 제도가 80개 이상의 정부 조직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그 어떠한 사업체도 함부로 서비스나 상품을 생산하지 못하게 만드는 괴랄한 제도였다. 이때문에 당시 90년대까지 인도 경제는 엄청나게 악영향을 받고 있었고 경제 기업인들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비리가 만연했다. 만모한 싱은 1991년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딴 악법들을 대거 뜯어고쳐야한다고 강력히 밀어붙였고, [[인도 국민회의]] 내부에서는 반대하는 기류가 강했지만 만모한 싱은 끝끝내 나라심하 라오 총리의 허락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로 인해 인도는 1991년부터 본격적인 개방 경제 체제로 접어들었고, 만모한 싱은 이외에도 외국인직접투자 규제 완화, 사업 민영화, 기업세 대폭 축소 등 경제 활성화 정책을 펼쳤고 이는 인도 경제 발전의 전격적인 신호탄을 쏘아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워낙 이때 만모한 싱이 손대놓은 부분이 많아서 일각에서는 그를 '인도의 [[덩샤오핑]]'이라고 불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